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건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는 숱한 시인, 묵객에게 예술적 서정을 불러일으켜 빚어진 선운사와 동백에 연원을 둔 작품 중 하나다. 고창 선운사 동백을 글로 그려낸 시인의 시는 ‘나뭇가지에서’ ‘땅 위에서’ ‘사람의 마음속에서’ 세 번을 핀다는 동백의 모습을 보지 않고도 상상하게 한다.
매월 세 번째 토요일 석중 스님 지도로 전국 기도성지를 찾아 정진하는 ‘33기도순례단’이 8월 17일 마음속에 붉게 핀 동백을 새기며 고창 선운사 대웅보전 부처님 앞에서 손을 모았다. 연일 계속되는 열대야와 무더위에 지친 심신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 순례단이 선운사에 도착하자 구름이 해를 덮어 더위를 식혀주고, 비를 뿌려 대지를 적셨다.
선운사 초입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는 조선 철종 9년(1858)에 세운 것으로, 대기(大機)는 원만해서 두루 응하는 것이고, 대용(大用)은 바로 끊는 것을 말한다.

선운사에 주석하며 원숙한 깨달음에서 나오는 자유자재한 경지로 후학을 제접했던 백파 스님을 기리는 비를 지나 도량으로 들어서자 33기도순례단을 환영하는 현수막과 함께 대웅보전이 순례단을 맞았다. 3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싼 대웅보전에 들어선 순례단은 비로자나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앉은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앞에 엎드렸다.
미륵보살이 머무는 내원과 천인들이 즐거움을 누리는 외원으로 구성된 천상의 정토를 가리키는 도솔천을 비유한 도솔산(선운산의 옛 이름) 선운사에서 ‘제15차 기도정진’을 시작한 순례단은 이날도 “모든 것을 갖춘 신통력과 넓고 크게 닦은 지혜와 방편으로 시방의 모든 국토에서 짧은 시간이라도 몸을 나타내지 않는 곳이 없는 관세음보살님께 일심으로 귀명정례할 것(具足神通力 廣修智方便 十方諸國土 無刹不現身 故我一心 歸命頂禮)”을 다짐하며,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을 살피는 관세음보살님의 화신이 되어 가족과 이웃을 살필 것”을 발원했다.

석중 스님의 지도로 “관세음보살” 염불을 이어간 순례단원들의 기도 열기는 한여름 더위를 밀어낼 만큼 뜨거웠고, 어느새 기도를 마칠 즈음엔 빗줄기도 그쳐 선운산 자락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석중 스님은 “선운사는 본래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 신앙의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지장보궁의 금동지장보살좌상,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 등 지장보살님들이 곳곳에 계신 도량”이라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님들이 보살피는 도량에서 정성껏 기도하고, 천상의 정토를 꿈꾸는 도솔산에서 ‘업장소멸‧소원성취’를 기원했으니 여러분들의 기도에 감응이 있을 것”이라고 축원했다.

순례단이 “관세음보살” 염불로 물들인 선운사는 백제 27대 위덕왕 24년(577)에 검단(檢旦, 黔丹) 스님이 창건하며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선운(禪雲)’이라고 지었다. 검단 스님은 용이 살던 큰 못을 메워 선운사를 세우고, 인근 주민들에게 소금을 구워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치는 중생구제의 모습을 보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보시해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 이름도 ‘검단리’로 칭했다.

선운사는 한창 번창할 무렵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전각이 있었고, 지금도 3개의 천연기념물과 20여 점의 보물‧유적을 품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본찰을 비롯해 참당암(懺堂庵)‧도솔암(兜率庵) 등 산내 암자에 주석했던 걸출한 고승대덕들의 발자취가 새겨진 도량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화엄학의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설파상언(雪坡尙彦) 스님과 선문(禪門)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백파긍선(白坡亘琁) 스님을 비롯해 구한말 청정율사 환응탄영(幻應坦泳) 스님, 근대불교의 선구자 박한영 스님 등이 선운사에서 수행하며 당대 불교를 이끌어갔다.

대웅보전 기도정진에 이어 방생법회를 마치고 도량 곳곳을 참배하며 천년고찰의 품격을 고스란히 마음에 새긴 김명자 불자는 “부부가 함께 33기도순례에 참여하고 있다. 관음정근을 하면서 우리 가족은 물론 주변인들에게도 불보살님 가피가 함께하길 기원하고 있다”며 기도순례에 임하는 마음을 전했다.
이주민 관련 사업을 주로 하는 법보신문 공익법인 일일시호일 활동에 깊은 관심을 보인 최병주 불자도 “여러 불자님들과 33기도순례를 함께 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밝은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며 순례기도가 주는 평안함에 만족해했다.
순례단은 동백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싼 대웅보전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각과 만개한 백일홍을 눈에 담으며 백제시대 창건 도량의 고즈넉함과 시인‧묵객들의 예찬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경관이 조화를 이룬 도솔산 선운사 기도 정진을 갈무리했다.

한편 법보신문이 후원하는 33기도순례단의 제16차 순례는 9월 21일 오대산 상원사에서 진행된다. 02)743-1080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