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지장도량의 메카 고창 선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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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09-20 08:45 조회2,224회 댓글0건본문
선운사 내원암 차실
천상세계가 있으면 지하세계도 있다고 믿었다. 인간 삶의 고통을 모두 벗어난 해탈의 세계가 천상세계라고 생각했다면 지하세계는 그 반대이다. 고통과 압제와 질곡이 더 심한 세계라고 고대인들은 믿었던 것이다. 불교에는 이 지하세계에 대한 천착이 있었다. 천착이라 함은 그 고통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신앙이 지장보살 신앙이다.
소승불교인 남방불교와 대승불교인 북방불교를 구분할 때 가장 큰 분기점이 바로 보살 사상이다. 보살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에 목표가 있는 신이다. 종교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 삶에 차고 넘치는 고통을 해결해 줘야 한다고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 혼자는 어렵고 누가 옆에서 도와줘야 하는데, 그 도움을 줄 수 있는 주체가 보통 인간보다는 신격, 불교에서는 보살이다. 이 보살 가운데서도 지장보살이 하층 밑바닥 인생들에게 크게 어필하였다.
지하세계의 고통받는 인간들을 구제한다는 신념이 투사된 보살이 바로 대승불교의 지장보살이고, 이 지장보살 신앙의 메카가 고창의 선운사이다. 선운사는 동백꽃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졌지만 한국 지장신앙의 본부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 다른 절에서는 건물 하나가 지장전이지만 선운사는 절 전체가 지장신앙으로 깔려 있는 절이다.
일본으로 팔려갔다가 다시 되돌아온 지장보살상.
한국 지장신앙의 본부
선운사에는 3지장이 있다. 상·중·하인데 맨 위에 있는 암자가 도솔암, 중간에 있는 것이 참당암, 그리고 아래에 있는 건물이 선운사 본찰이다. 맨 위에 있는 암자 도솔암은 미륵신앙이 배경이다. 도솔, 내원궁 같은 단어들이 미륵과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도솔암에서 행해졌던 신앙행위는 지장신앙이었다.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잘 보내는 영가천도로 유명한 암자이기 때문이다. 도솔암은 특히 잘 떨어지지 않는 묵은 귀신을 저승으로 보내는 데 탁월했다. 불교에서는 귀신을 영가(靈駕)라고 부른다. 묵은 영가를 떼어내는 데에 선운사 도솔암이 탁월하다는 소문이 수백 년 전부터 나 있었다.
영가는 지하세계의 고통을 상징한다. 구천을 떠돈다고 하지만 떠돈다는 말이 사실은 지하세계의 고통과 직결된다. 전라북도 지역의 들판과 야산에서는 민초들이 세워 놓은 하체매몰불(下體埋沒佛)이 많이 발견된다. 하체가 땅속에 묻혀 있고 상체는 밖으로 나와 있는 형태를 가리킨다. 다른 지역에는 잘 없는데 유독 이 지역에 많이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이것이 지장신앙과 미륵신앙의 결합이라고 생각한다. 땅속에 있던 지장보살이 땅 위 지상의 세계로 나오는 과정을 보여준다. 땅 위로 나와서는 미륵불이 된다. 미륵불은 메시아 사상이다.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 출현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지장이 땅속에서 나와 새로운 혁명의 지도자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준 불상이 ‘하체매몰불’이 되는 셈이다. 지장신앙으로 상징되는 불교신앙은 철저하게 억압받던 민초들의 신앙이 아니었나 싶다. 땅속은 밑바닥을 가리키지 않던가! 이는 백제 멸망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멸망한 백제 유민들이 품었던 한, 식민지 백성들이 품었던 한, 그것이 지장신앙과 어울린다. 그 지장신앙이 미륵신앙을 만나 꿈틀거리면서 땅 밖으로 나올 때 하체매몰불로 표현된다.
선운사 근처 변산(邊山)의 가파른 절벽 모퉁이 서너 평 되는 곳에는 한국 미륵신앙의 창시자로 볼 수 있는 진표율사의 유적이 있다. 진표율사가 수도하다가 영험이 없자 죽으려고 절벽에서 몸을 던졌는데 미륵보살이 그 던진 몸을 받아줬다는 것 아닌가. 그 영험한 기적의 도량이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인데,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얻었던 그 도량이 선운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선운사의 지장신앙이 진표율사를 매개로 해서 미륵신앙으로 전환되었다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오늘날 전라북도에는 기독교 신자가 많다. 불교신자는 소수이다. 그렇다 보니 전라북도 사찰의 주차장에는 경상도 번호판을 단 버스가 많이 주차되어 있다. 전라도 사찰을 먹여살리는 사람들은 경상도의 불교신도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만큼은 영호남의 교류가 활발하다. 영남의 신도들이 호남 사찰에 많이 오고, 호남 출신들이 머리 깎고 스님이 될 때는 영남으로 많이 간다.
일본에서 돌아온 지장보살상
유서 깊은 선운사는 절의 역사와 사격(寺格)에 비추어 볼 때 한가한 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도 모르고 지장신앙이 뭔지도 모르는 행락객들만 왔다갔다 한다. 종교는 이론이 아니고 영험이다. 어떻게 영험을 경험할 것인가? 선운사 지장전의 지장보살상에는 특별한 영험담이 들어 있다.
1930년대 문화재 도굴범들이 지장전에 모셔져 있던 지장보살상을 훔쳐갔다. 일본에 가지고 가서 일본 컬렉터에게 팔았다. 그런데 이 보살상을 매입한 일본 사람의 꿈에 지장보살상이 나타났다. ‘나는 고창 선운사에 있던 지장보살이다. 나를 거기에 다시 갖다 놔라!’ 이 꿈을 꾼 사람은 이상하고 꺼림칙하여 다른 사람에게 다시 얼른 팔아 버렸다. 두 번째 산 사람도 역시 이상한 꿈을 꿨던 모양이다. 이렇게 종교적 영험을 지닌 불상을 개인이 지니고 있으면 좋지 않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경배하고 절을 받았던 불상에는 어떤 종교적 에너지가 뭉쳐 있어 사이즈도 얼마 안 되는 보통 사람이 그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다.
지장보살상을 사들인 일본인들에게는 거듭 집안에 우환과 불상사가 일어났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도 전매를 해서 여섯 번째 사람이 이 보살상을 구입하였다. 역시 그 사람에게도 꿈에 보살상이 나타났다. ‘나를 다시 선운사에 갖다 놔라!’ 이 여섯 번째 매입자는 신앙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비싸게 주고 샀지만 현몽을 그냥 무시할 수 없었다. 한국에 수소문해 보니 선운사라는 절이 실재하였다. 그래서 결국 선운사로 다시 지장보살상이 되돌아왔다. 지금도 지장전에 모셔져 있는 보살상이 그 영험한 보살상이다.
선운사 산내 암자 가운데 근래에 복원한 암자인 내원암(內院庵)의 터가 좋다는 말을 듣고 가 봤다. 주지인 경우(耕牛) 스님의 거처도 여기에 있다. 터를 보니 우선 암자 앞의 안산이 삼인봉이다. 한자는 확인을 못해봤지만 봉우리 모양으로 볼 때 ‘三仁峰’이 아닌가 싶다. 어질 인(仁) 자가 들어가는 봉우리는 부드럽다. 3개의 봉우리가 둥그스름하면서도 문필봉처럼 약간 솟아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나란히 서 있는 세 개의 봉우리가 여간 아름다운 게 아니다. 삼인봉 옆으로 또 하나의 봉우리가 비슷한 모양으로 서 있어서 총 4개의 봉우리가 앞에 펼쳐져 있는 셈이다. 구전으로는 ‘3인의 정승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노적봉처럼 보인다. 재물이 떨어지지 않는 터이다. 사찰도 재물이 있어야 돌아간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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