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산 선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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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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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산 선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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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보물 제 290호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하며,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交窓)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佛壁)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보물 제 1752호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高敞 禪雲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의 형태는 넓고 당당한 어깨, 긴 허리, 넓고 낮은 무릎으로 인하여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갖춘 대형 소조상들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상 등 17세기 전반기 각지의 대표적인 사찰에서 조성된다. 대형의 소조불상의 조성 목적은 이전 시대와 달리 새로워진 불교계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고, 전란으로 소실된 불상을 빠른 시간 내에 재건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삼불상은 양대 전란 이후 재건불사 과정과 당시 달라진 시대적 분위기를 직·간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대좌의 밑면에 기록한 묵서명에서 불상의 조성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라는 삼불상의 존명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어 비로자나 삼불상의 도상연구에 기준이 된다. 그리고 1633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와 17세기 전반기의 대표적 조각승 무염과 그의 문하승(門下僧)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정확한 조성주체가 밝혀져 있고, 대형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조각적·종교적 완성도가 높은 우수한 작품이다.


금동지장보살좌상 보물 제 279호

선운사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1m이다. 머리는 고려시대 지장보살상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두건(頭巾)을 쓴 모습이며, 두건을 묶은 좁은 띠가 이마를 두른 후 귀를 덮고 양 가슴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풍만한 얼굴에 조그마한 아래턱 주위로 살집이 많은 이중턱을 이루어 후덕한 인상을 주며, 목에는 굵게 주름진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하체는 무릎 높이가 낮아서 상체에 비해 빈약한 편이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옷에 덮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어서 엄지와 넷째손가락을 맞댈 듯 굽혔고, 왼손은 아랫배에 붙여서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렸는데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에서 끈으로 매듭지은 독특한 치레장식이 특징적인데, 이는 고승의 진영이나 불ㆍ보살상에서 보이는 형식이기도 하다.
겉옷 안에는 수평으로 가로질러 가슴까지 올라온 군의(裙衣)를 띠매듭으로 단정하게 동여매었다.


이 보살상은 선운사 도솔암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선운사지장보살좌상(禪雲寺地藏菩薩坐像, 보물 제280호)과 목걸이 장식이나 밋밋한 가슴표현 등이 유사하지만, 머리가 크고 하체가 빈약하여 신체비례가 부자연스러운 점, 목이 짧고 어깨가 올라가 움츠린 듯한 자세, 간략한 장식과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선운사지장보살좌상과 함께 그 예가 드문 지장보살상의 하나로, 조선시대 지장신앙의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지장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때 영험함을 보인 사실로 인해 더욱 널리 추앙받고 있다. 1936년 어느 여름에 일본인 2명과 우리나라 사람 1명이 공모하여 보살상을 훔쳐간 뒤, 거금을 받고 매매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지장보살상이 영이(靈異)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였다. 소장자는 다소 이상한 꿈으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후로 병이 들고 가세(家勢)가 점점 기울게 되자 꺼림칙한 마음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지장보살이 소장자의 꿈에 나타났으나 그 역시 이를 무시하였고,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게 되자 다시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이 보살상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소장하게 된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고창경찰서에 신고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시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때가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이었다. 당시 잃어버린 보살상을 다시 모시고 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에도 사건에 대한 개요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주지는 '이우운(李雨雲)'으로 기재되어 있다.


지장보살좌상 보물 제 280호

선운사 도솔암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96.9㎝이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모두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상체가 늘씬하고 당당하여 고려 후기의 장곡사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이나 문수사금동불좌상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길상좌(吉祥坐)를 한 탄력적인 하체나 부드럽고 단아한 어깨선, 상ㆍ하체의 비례 등이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형태를 지니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는데, 이마를 감싼 후 귀 뒤로 넘겨서 어깨까지 천을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의 두건을 쓴 지장보살〔被巾地藏〕의 모습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던 도상적 특징으로, 현존하는 많은 고려불화에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이목구비 등을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표현하였다. 양 귀에는 만개한 화문(花紋)을 띠로 연결하여 귓불에 묶은 이식(耳飾)을 착용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보살상이 원형 고리를 길게 늘어뜨려 매달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특이한 형태라 하겠다.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인(中品印)을 취하고 왼손은 가슴과 배 중간쯤에 들어 법륜(法輪)을 잡고 있는데, 이는 육도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로서 보주(寶珠)ㆍ석장(錫杖)ㆍ법륜 등의 지물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의 일반적인 특성을 표현한 것이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 무릎에 올린 모양으로 발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어깨나 소매ㆍ무릎 등에 몇 가닥의 간단한 주름만을 표현하여, 상에 나타난 선묘는 유려하게 휘어지는 맛과 함께 단순ㆍ명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도솔암 마애불 보물 제 1200호

도솔암의 서편 암벽 칠송대(七松臺)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불상은 낮은 부조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뾰족한 육계가 있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평면적인 얼굴에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우뚝 솟은 코에 앞으로 내민 일자형의 두툼한 입술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인다.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고, 목은 표현하지 않아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상체는 방형에 가슴이 넓고 평면적이며, 결가부좌한 넓은 하체에 손과 발 역시 체구에 비해 큼직큼직하다. 투박한 두 손은 활짝 편 채 아랫배에 가지런히 붙여져 있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으로 두꺼운 편은 아니나 옷주름선이 선각으로 형식화되어 있고, 평평한 가슴 아래로 선명하고 단정한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대좌는 비교적 높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상대(上臺)에는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고 하대(下臺)는 간략한 연꽃무늬의 연화좌로서 전반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다.
광배는 표현되지 않았고, 가슴에는 사각형으로 큼직하게 복장(腹藏)구멍을 나타내었다.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고 부러진 서까래가 꽂혀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누각 형태의 목조 전실(前室)을 마련하였던 흔적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는데 불상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학농민전쟁 무렵에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참당암 대웅전 보물 제 803호

선운사 산내암자 참당암의 중심건물로서 신라시대 의운화상(義雲和尙)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매 칸마다 4분합문을 달았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다포양식의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앞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양식인 반면 뒷면 공포는 굽면이 곡선이다.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1900년에 후불탱화로서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고려시대 건축 부재(部材)의 양식을 지니고 있어 이채로우며,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고창 선운사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 보물 제2031호

참당암의 약사전(藥師殿)에 봉안되어 있는 납석제(臘石製)의 좌상으로서 높이 80㎝, 무릎폭 50㎝이다.


이 존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이마에 테를 두르고 있는 점, 두건의 아랫자락이 어깨를 덮고 있는 점, 가슴에 늘어뜨린 목걸이 장식이나 두터운 귀 부분 등이 선운사 금동보살좌상과 흡사하다. 다만 수인(手印)이 금동보살좌상처럼 사실적이지 못하며, 두껍고 높은 무릎에 표현된 옷주름 등이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더욱 간략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인은 이례적으로 왼손이 무릎 위에서 촉지인(觸地印)을 짓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 두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다. 이러한 납석제좌상은 그 크기나 상호ㆍ의관 등이 금동보살좌상과 공통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오른손에 얼핏 보아 약함인 듯한 지물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라는 명칭이 붙여진 듯하나, 여래상에는 두건이 아닌 육계가 있어야 하고 보배영락을 장식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여래상이 아닌 보살상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상의 명칭은 약사여래불상이 아닌 지장보살좌상(地藏菩薩坐像)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고창 선운사 만세루 보물 제2065호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강당건물로서,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19세기 말에 중건된 익공계(翼工系) 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절의 창건 당시부터 건립되어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도 700년이 된 두 개의 아름드리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끼게 한다.


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고 비규격적인 누(樓)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의 중앙칸(御間)은 폭이 390cm로서 양쪽 협간(夾間)에 비해 2배 정도 넓다.


자연석 기단에 기둥은 일부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사용하였고, 자연목을 다듬지 않은 채 껍질만 벗겨 쓰기도 하였다. 중앙 칸의 양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내부의 서쪽 앞 두 칸씩은 칸막이로서 2층 구조를 만들어 종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얹었고 기둥 윗부분에는 작은 나무토막들을 포개 쌓았다. 특히 뒷면이 대웅전과 마주보며 개방된 것은 설법을 위한 강당의 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면의 판창(板窓)을 열면 대웅전의 앞마당에서부터 강당을 포함한 공간이 막힘없이 트이게 되어 통풍과 전망을 아울러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하였다.

석씨원류 전북유형문화재 제 14호

조선 인조 26년(1648)에 새긴 가로 39㎝, 세로 29.5㎝의 목판본으로, 선운사 관음전에 봉안되어 있다. 원래 103매의 목판으로 판각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절반가량이 망실되고 50매 100판의 원판과 별도의 2매 4판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석씨원류』란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석가모니 이후 서역 및 중국에서 불법이 전파된 사실을 기술한 것이다. 선운사 목판은 망실 부분이 많아서 편집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현종 14년(1673)에 경기도 불암사(佛巖寺)에서 새긴 『석씨원류』 목판이 현재까지 완질로 남아 있고 간행시기도 비슷하여, 유포 당시의 간행내력과 편집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선운사판 『석씨원류』는 먼저 명나라 헌종황제의 「어제석씨원류서(御製釋氏源流序)」가 실리고 이어 하호연(河浩然)이 지은 「석씨원류서」가 실려 있다.


하호연의 서에 의하면, 이 책은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구해온 것을 인조 26년(1648)에 최서용(崔瑞龍)ㆍ해운법사(海運法師) 등이 간행한 것으로, 불암사 판보다 25년이나 앞서 있다.


책의 편제는 글의 위쪽에 그림을 배치하여 책의 내용을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불암사판 등의 책이 왼쪽 면에 글을 싣고 오른쪽 면에 그림을 두어 한 항목이 2면을 차지한 양식에 비해, 한 항목의 도설(圖說)이 1면에서 모두 끝나게 하는 편제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목판인쇄사에서 새로운 편제의 도설판형(圖說版型)을 채택하여 방대한 양의 서책을 간행함으로써 판식과 판화의 역사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영산전 목조삼존불상 전북유형문화재 제 28호

대웅보전 서편의 영산전에 봉안된 목조삼존상으로서, 석가모니불 좌상을 주존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 입상이 양쪽에서 협시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의 높이는 3m, 협시보살의 높이는 2.4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며, 주존은 16각의 난간을 두른 목각연화대좌(木刻蓮花臺座)에 모셔져 있다.


가운데 석가여래좌상은 몸에 비해 머리가 크고 육계는 없으며, 얼굴은 방형(方形)에 가깝다. 목부문 아래에 삼도(三道)가 좁게 표현되어 있고, 통견납의(通肩衲衣)의 간략한 의습에 가슴 밑 군의상단(裙衣上端)이 직선적이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서 손 등을 위로 하여 중지(中指)를 무릎에 접하고 있고, 왼손은 손 등을 밑으로 하여 제2지(第二指)와 무지(拇指)를 맞대고 있다.


양 협시보살은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寶冠)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이 삼존상은 목조불로서는 희귀한 우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육층석탑 전북유형문화재 제 29호

선운사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방형의 축대 안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정사각형의 돌 윗변을 둥글게 처리한 하대석을 얹었다. 그 위에 다시 방형의 중석(中石)을 세우고 중석의 네 귀는 우주(隅柱)로 조각하였다.


갑석(甲石)은 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면은 수평으로 다듬고 중앙에는 1단의 받침을 새겼으며 윗면은 약간의 경사를 이룬 채 중앙에 1단의 옥신(屋身) 괴임이 있다. 각 층의 옥신은 하나의 돌로 만들고 네 귀마다 우주를 조각하였으며, 추녀는 수평을 유지한 채 하늘을 향해 약간 반전되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2층 옥신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3층 옥개석 역시 2층에 비해 폭이 좁아져 체감률이 심한 편이며, 3층 이상부터는 동일한 체감률로 이루어져 있다. 6층의 옥개석 위에 노반이 있고 노반 위에 복발(覆鉢)이 남아 있으며, 그 위에 팔각의 귀꽃으로 각출된 보개(寶蓋)를 얹어 놓았다.


사적기에는 조선 성종 때 행호선사(幸浩禪師)가 홀로 우뚝 솟은 이 9층 석탑을 보고 사찰의 중창을 도모하였다고 적고 있어, 현재의 탑은 성종 이후 3층이 유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범종 전북유형문화재 제 31호

선운사 천왕문 2층에 걸려 있는 조선 후기의 범종이다.


종신(鍾身)의 높이는 103㎝, 구경(口徑) 93㎝, 견경(肩徑) 56㎝이며,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를 포함한 전체의 총 높이는 129㎝이다.


이 범종은 한국 범종의 특징인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없는 대신 윗면에 1개의 구멍을 뚫었고, 용뉴는 2마리 용으로 만들었다. 어깨부분에는 2줄의 선을 둘렀는데 선 안쪽으로 명문(銘文)을 새겼다. 몸체 중앙에는 3개의 돌출된 선을 둘러 위와 아래로 구분해 놓았고, 윗부분에는 연화당초문대(蓮花唐草紋帶)로 사각형 유곽대를 만들었으며, 그 안에 가운데가 돌출된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서 있는 보살을 양각하고, 머리 위로 8개의 작은 원을 만들어 원 안에 범자(梵字)를 하나씩 새겨 넣었다.


용추는 머리부분이 외방을 향한 쌍두용(雙頭龍)을 투각하였고, 복잡한 세부처리는 주조한 다음 동편(銅片)을 잘라 부착시키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이 범종에는 음각된 '茂長縣禪雲寺大鍾重六百五十斤 嘉慶二十三年戊寅九月日 改鑄 都片手 嶺南 權東三 副 李命還…'이라는 명문이 있다.


이를 살펴보면 순조 18년(1818)에 도편수 권동삼과 부편수 이명환에 의해 개주(改鑄)되었으며, 이때 선운사 주지인 처영(處英)스님이 도감으로서 주조를 감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파율사비 전북유형문화재 제 122호

백파율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이 비석은 선운사 입구로 들어서서 오른쪽 숲 속의 부도 밭에 세워져 있다.


조선 철종 9년(1858)에 건립한 것으로 비명(碑銘)은 조선시대의 대명필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필적이다.


조선조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오랜 침체기를 헤치며 조선후기 불교의 참신한 종풍(宗風)을 일으킨 화엄종주(華嚴宗主) 백파율사의 업적이 적혀 있는 이 비석은, 율사의 업적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비석은 네모난 받침 위에 몸통을 세우고 지붕돌을 씌운 모습으로 되어 있다.


선운사 사적기 전북유형문화재 제 155호

선운사적(禪雲寺蹟)」ㆍ「참당사사적기(懺堂寺事蹟記)」ㆍ「운사고적(雲寺古蹟)」의 3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선운사의 규모와 연혁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적이다.


「선운사적」은 조선 영조 22년(1746)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70㎝ 47㎝의 크기에 표지를 포함하여 총 29장이다.
내용은 선운사 각 건물의 규모와 전각ㆍ요사에 봉안된 불상ㆍ탱화ㆍ기물(器物)ㆍ경전 등의 물목(物目)을 기록하였다.


「참당사사적기」는 77㎝ 57㎝의 크기에 표지를 포함하여 총 21장이며, 참당사와 선운사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임상우(林相雨)가 정조 18년(1794)에 쓴 「도솔산대참사고사」와 『대참사법당기」, 호월자(浩月子)가 숙종 39년(1713)에 쓴 「대참사사적기」, 능허후인(凌虛後人)이 숙종 33년(1707)에 쓴 「선운사창수승적기」 등이 실려 있다.


「운사고적」은 70㎝ 47㎝의 크기에 표지를 포함하여 총 31장이다. 숙종 33년(1713)에 능허후인이 쓴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와 계사년 5월에 쓴 「사중대종명(寺中大鍾銘)」, 광해 6년(1614)에 쓴 「전각요사창건연대방명열목」 등이 실려 있다.


참당암 동종 전북유형문화재 제 136호

조선 정조 12년(1788)에 조성된 범종으로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 안에 있다. 총 높이는 100㎝, 구경 50㎝, 복경(腹經) 60㎝, 구연(口緣) 두께 4.4㎝의 전형적인 조선시대 범종이다.


종신(鐘身)에는 사방에 보살입상이 있는데, 섬세하고 우아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보살상 사이마다 유곽(乳郭)을 양각하였으며, 넓은 유곽 안에는 굵은 거치문대(鋸齒文帶)를 새겼다. 종의 어깨 부분에는 12개의 원권(圓圈)을 두르고 각 원권 안에 범자(梵字) 1자씩을 양각하였다. 보살입상 외곽하연(外郭下緣)에 접하여 돌대(突帶)를 두르고, 구연(口緣)과의 중간에는 한줄기의 돌대가 있는데, 이 양 돌대 안에는 명문판(銘文板)이 불규칙하게 주조되어 명문ㆍ시주명 등이 음각되어 있다.


구연대(口緣帶)는 넓은 평면돌대 위에 유곽과 동일한 거치문대를 두르고 있으며, 용뉴는 빈약한 용체의 쌍룡이 꼬리를 맞댄 채 사지를 딛고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다.


명문에 따르면 이 종은 정조 12년에 내원암 중종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내원암은 현재 내원골에 터만 남아 있다.


선운사 신중도 전북유형문화재 제 230호

1807년(순조 7)에 수화승(首畵僧) 오봉(鰲峰)스님이 수화사로, 寶月, 玩月, 環益, 敏詵, 學允, 福順 스님 등에 의해 제작된 작품으로, 상단에는 제석천과 범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天部衆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천룡팔부 및 武裝의 신장들을 배치하였다.


상단 중앙에는 큼직하게 표현된 제석천과 범천은 서로 마주보며 합장을 하고 서있다. 화면 구성이 빼어나고 원만한 상호 및 인체비례의 적정 등 인물 표현이 자연스럽고 색채 표현이 조화로운 수작(秀作)으로 평가된다.


석상암 산신도 전북유형문화재 제 231호

1847년 정미년(丁未年)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세로 111cm, 가로 102cm의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비단바탕에 산신이 ?杖子를 들고 호랑이 위에 올라타고 있는 모습이다. 색채가 안정적이며 조화로운 필치와 호랑이의 움직임 자연스럽고 산신의 상호 표현이 뛰어난 수작(秀作)으로 평가된다.


석상암 산신도는 산신이 호랑이 위에 半跏坐의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 산신은 긴 눈썹과 흰 수염 등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이다. 호랑이는 네 발로 땅을 꽉 디딘 채 꼬리를 치켜세우고 앞을 응시하고 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꼬리를 힘껏 치켜세운 모습, 호랑이의 털 하나하나까지 그린 사실적인 묘사 등에서 마치 김홍도의 호랑이그림을 보는 듯하지만, 동그란 눈과 입 사이를 삐죽 튀어나온 이빨 등에서 民畵的인 익살과 해학이 보인다.

선운사 도솔암 나한전 문화재자료 제 110호

선운사의 산내암자인 도솔암에 있는 법당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건축수법으로 보아 조선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나한전 내부에는 흙으로 빚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이 협시하였고, 1910년 용문암에서 옮겨온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도솔암은 선운사의 산내암자로서 대웅전 서쪽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원래는 여섯 도솔암이 있었으나 현재는 상하 2개의 도솔암만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시대 도솔암 용문굴에 이무기가 살면서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이를 쫓아내기 위해 인도에서 나한상(羅漢像)을 모셔와 이곳에 안치하자 이무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무기가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무기가 뚫고 간 바위 위에 나한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 문화재자료 제 125호

험준한 바위 위에 세운 법당으로 상도솔암(上兜率庵)이라고도 한다. 조선 중종 6년(1511)에 중창하고, 숙종 20년(1694)에 3창(三創), 순조 17년(1817)에 4창(四創)하였다.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기단 없이 편편한 곳에 자리를 잡아 원형초석만 두었는데, 기단이 없어 건물이 낮아지므로 하인방(下引枋)의 높이만큼 되는 장초석(長礎石)을 사용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벽선에 아자형(亞字形) 2분합문(分閤門)을 달았다. 천장의 구조는 우물천장이며,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겹처마에 8작지붕을 올려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내원궁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을 봉안하고 있다.


석상암 칠성도 문화재자료 제 192호

19세기말 20세기에 호남지역에서 활용한 화승(畵僧) 금호 약효(錦湖 若效)와 그의 제자들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불화로 추정된다. 석상암 칠성도는 熾盛光如來三尊을 중심으로 七星如來와 七元星君, 七星童子, 太上老君, 三台六星 등을 배치하였다.


중앙에 위치한 치성광여래는 二重輪光의 광배를 배경으로 오른손은 가슴으로 들어 올리고 왼손은 무릎 위에 대고 손가락을 마주잡은 채 결가부좌하였다. 안정된 구도와 색의 조화, 섬세한 표현이 두드러지는 불화로 화기(畵記)의 손상이 있어 정확한 제작년대를 알 수 없지만 조선말기 불화조성 방법 및 안료의 성분 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선운사의 동백나무 숲 천연기념물 제 184호

이 동백나무숲은 백제 위덕왕 24년(577) 선운사가 세워진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나무의 평균높이는 약 6m이고 둘레는 30㎝로서, 절 뒷쪽 비스듬한 산 아래에 30m 넓이의 가느다란 띠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ㆍ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ㆍ추백(秋栢)ㆍ동백(冬栢)으로 부른다. 이 동백나무숲은 아름다운 사찰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사찰림으로서 문화적 가치와 동백나무숲으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장사송 천연기념물 제 354호

선운사에서 도솔암을 올라가는 길가의 진흥굴 바로 앞에서 자라고 있다. 수령(樹齡)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3m, 둘레는 2.95m이다. 높이 2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둘로 갈라져 있고, 그 위에서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채살처럼 퍼져 있다.


고창사람들은 이 나무를 '장사송' 또는 '진흥송'이라고 하는데, 장사송은 이 지역의 옛이름이 장사현이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며, 진흥송은 진흥굴 앞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답고 생육상태가 양호하며 보기 드물게 오래된 소나무로서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송악 천연기념물 제 367호

절벽 아래쪽에 뿌리를 박고 절벽을 온통 뒤덮은 채 뻗어 올라 자라는데, 정확한 수령(樹齡)은 알 수 없으나 보기 드물 정도의 크기로 보아 600여 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23m, 가슴높이 둘레 2.95m이고, 가지의 길이는 동ㆍ서쪽이 16.8m, 남ㆍ북쪽이 16.7m이다. 송악은 두릅나무 과에 속하는 늘 푸른 덩굴식물로, 줄기에서 뿌리가 나와 암석 또는 다른 나무 위에 붙어 자라며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


잎은 광택이 있는 진한 녹색이고 꽃은 10월에 녹색으로 피며, 열매는 다음해 5월에 둥글고 검게 익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남해안 및 섬지방의 숲 속에서 주로 자라고 있다. 고창 삼인리는 송악이 내륙에서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에 가까우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주소 : (56452) 전북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250전화 : 063-561-1422팩스 : 063-561-1127 이메일 : seonunsa@hanmail.net / master@seonuns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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