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산 선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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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소개

도솔산 선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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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兜率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소중한 불교문화유산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시인ㆍ묵객들의 예찬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전쟁 난민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연혁


백제 27대 위덕왕 24년(577)에 검단(檢旦, 黔丹) 스님이 선운사를 창건한 뒤
통일신라기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효정(孝正) 스님이 퇴락한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사찰을 크게 중창한 이는 행호 극유(幸浩克乳) 스님이다. 1472년(성종 3) 선운산의 한 암자에 머물며 수도하고 있던 행호스님은, 구층 석탑만이 외롭게 남은 채 폐허화된 선운사를 보고 안타까이 여겨 중창을 발원하였다. 이듬해(1473년) 제자 종념(終念) 스님과 함께 상경하여 성종의 작은아버지 덕원군(德源君)에게 중창의 뜻을 밝히고 도움을 청하자,덕원군은 재물과 함께 직접 원문(願文)을 써주었다.이에 나주 보을정도(寶乙丁島)에 가서 재목 1천여 그루를 구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기와 20여 가마를 구워, 1474년 가을에 2층의 장륙전(丈六殿)과 관음전(觀音殿)을 완공하였으며 이듬해 봄에는 선왕(先王)의 영혼을 추모하는 수륙재(水陸齋)를 크게 열었다. 1476년에는 천불대광명전(千佛大光明殿)을 조성하였고, 1481년에는 모든 건물의 단청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지장전(地藏殿)ㆍ동상실(東上室)ㆍ금당(金堂)ㆍ능인전(能仁殿)을 짓고 영산회(靈山會) 등 53불회탱(五十三佛會幀)을 조성하였다. 이와 같이 10여 년에 걸친 극유스님의 중창불사로 인해 선운사는 옛 모습을 되찾아,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도 왕실의 원찰(願刹)로서 법등(法燈)을 환히 밝히게 되었다.그러나 100여 년이 지난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 어실(御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타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이후 1608년(광해군 즉위년)부터 2년간 승려 수십 명이 근근이 선방과 요사를 마련하고, 수년 동안 힘을 모아 법당 3칸을 지었다.


이러한 사정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던 무장현감 송석조(宋碩祚)가, 선운사의 어실은 왕실의 재(齋)를 여는 곳이었으므로 나라의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1613년(광해군 5) 봄 일관(一寬) 스님에게 중창을 의논하였다. 이에 일관스님은 원준(元俊) 스님과 힘을 합하여 수많은 집을 돌며 시주를 모으고, 어실을 구실삼아 도백(道伯)으로부터 고창 문수산의 재목을 얻어 보전(寶殿) 5칸을 세운 다음, 상하 누각과 동서 양실(兩室)을 건립하였다.


곧이어 법당ㆍ천불전ㆍ지장전ㆍ능인전 등을 창건하여 1619년까지 6년에 걸쳐 사찰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로도 일관ㆍ원준스님 등의 뜻을 이어받은 스님들에 의해 중수와 중건이 계속되어 1620년에 정문ㆍ향운각(香雲閣)과 1624년에 천왕문(天王門)을 세우고 1634년 법당에 삼존상을 조성ㆍ봉안하였으며, 1658년에 시왕전(十王殿), 1659년에 해납료(海納寮)ㆍ삼선료(三仙寮), 1676년에 약사전(藥師殿), 1677년에 나한전(羅漢殿), 1678년에 극락전(極樂殿), 1682년에 칠성료(七星寮)ㆍ청심료(淸心寮), 1691년에 대승전(大乘殿) 등을 창건하였다. 이 무렵 절에서 수행하던 대중은 무려 260여 명에 달하여 당시 사찰의 규모와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어 1693년에 동운암(東雲庵)을 창건하고 1699년에 미륵전(彌勒殿),1705년에 관음전ㆍ양계료(養鷄寮)ㆍ양봉료(養鳳寮), 1706년에 팔상전(八相殿), 1709년에 한산전, 1713년에 장육전 등을 창건하였다.


선운사에서는 특히 걸출한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많이 배출되어 사격(寺格)을 드높였다. 조선 후기 화엄학의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설파 상언(雪坡尙彦) 스님과 선문(禪門)의 중흥주로 추앙받는 백파 긍선(白坡亘琁) 스님을 비롯하여, 구한말의 청정율사 환응 탄영(幻應坦泳) 스님, 근대불교의 선구자 박한영(朴漢永) 스님 등이 선운사에서 수행하면서 당대의 불교를 이끌어갔던 것이다. 현존하는 전각은 대웅보전과 관음전ㆍ영산전ㆍ팔상전ㆍ명부전ㆍ산신당ㆍ만세루ㆍ천왕문이 있고,대웅보전 앞에는 6층 석탑과 괘불대ㆍ당간지주ㆍ석주 등이 있으며, 산내암자로는 참당암(懺堂庵)ㆍ도솔암(兜率庵)ㆍ동운암(東雲庵)ㆍ석상암(石上庵) 등 네 곳이 있다.


선운사 대웅보전 · 대웅보전 소조삼신삼세불 · 지장보궁 금동지장보살좌상 · 만세루는 국가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영산전ㆍ영산전 목조삼존불상ㆍ『석씨원류』ㆍ『선운사사적기』ㆍ대웅보전 신중도ㆍ육층석탑ㆍ범종ㆍ만세루ㆍ백파율사비 ㆍ등이 지방유형문화유산로 등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경내외의 동백나무숲 ㆍ장사송ㆍ송악은 자연유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설파상언


설파 상언(1707∼1791) 스님은 조선시대 화엄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고승으로서 호는 설파(雪坡), 법명은 상언(尙彦)이며 속성은 전주이씨이다.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읜 뒤 19세에 선운사로 출가하여 희섬(希暹) 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연봉(蓮峰)스님과 체정(體淨)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았다.한때 벽암(碧岩)의 법계(法系)에 속하는 회암(晦庵) 스님의 지도를 받았으나, 특별히 섬긴 스승은 체정이다. 1739년 용추사(龍湫寺)에서 처음으로 강좌를 열었는데, 그때 이미 삼승오교(三乘五敎)에 통달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화엄학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까지 중국의 청량(淸凉)이 지은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抄』90권이 우리나라 화엄학 연구의 지침서가되고 있었는데,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어렵게 쓰여 있어 공부하는 이에 따라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컸다. 이에 스님은 일일이 주석을 달고 알기 쉽게 분류한 『청량초적결은과 淸凉抄摘抉隱科』를 펴냄으로써 후학의 길잡이가 되도록 하였다.또한 『화엄경』의 여러 판본들의 차이점을 보유(補遺)하고자 해인사에 있는 모든 판본들을 합하여 80권본의 정본을 만든 뒤 낙안의 징광사(澄光寺)에 봉안하였다. 그 뒤 금강산ㆍ묘향산ㆍ두류산 등지에 머물면서 참선에 힘을 기울여 교와 선을 함께 닦았다.


1770년 징광사에 불이 나서 화엄판목이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지자 구송(口誦)으로 과거에 이루었던 80권본을 다시 판각하게 하였으며,이를 영각사(靈覺寺)에 경판각을 짓고 봉안하였다. 만년에는 매일 1만 편씩 염불하기를 10여 년 동안 계속하였고, 1790년 12월에 병세를 보이다가 이듬해 1월 3일에 앉아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法臘) 66세였다. 다비 후 제자들이 사리를 거두어 영원사와 선운사에탑을 세웠다.


백파긍선


백파 긍선(1767∼1852) 스님은 조선시대 선문(禪門)의 중흥주로 추앙받는 고승으로서 법호는 백파(白坡), 법명은 긍선(亘琁)이며 속성은 전주이씨이다. 전북 무장에서 태어나 12세에 출가하여 선운사(禪雲寺) 시헌(詩憲) 스님의 제자가 된 뒤 연곡(蓮谷)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으며, 21세 때 상언(尙彦)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그뒤 평안북도 초산의 용문암(龍門庵)에서 수행하다가 도를 깨우쳤으며, 지리산 영원암(靈源庵)으로 가서 상언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1년간 공부를 계속하다가 영구산 구암사(龜巖寺)에서 설봉 회정(雪峰懷淨) 스님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26세 때에 백양산 운문암(雲門庵)에서 강좌를 열어 대중 1백여 명에게 선강(禪講)을 한 뒤 20여 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1811년에는 "불법의 진실한 뜻이 문자에 있지 않고 도를 깨닫는 데 있는데도 스스로 법에 어긋난 말만을 늘어놓았다"고 참회한 뒤, 평안북도 초산 용문동으로 들어가서 5년 동안 수선결사운동(修禪結社運動)을 전개하였다. 그 뒤 다시 운문암에서 수도와 포교로써 선법을현양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사람들이 '호남선백'이라고 불렀다. 이때 선의 지침서인 『선문수경 禪門手鏡』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당시 선사들 사이에서 일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830년에 다시 구암사로 돌아와서 선강법회를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1840년부터 화엄사(華嚴寺)의 선사영당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좌선하다가 1852년 4월에 입적하였는데, 그때의 나이 86세, 법랍 74세였다. 다비 후에 제자들이 구암사에 탑을 세우고 영정을 화장사(華藏寺)에 봉안했으며, 1858년에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찬한 비를 선운사에 세웠다. 법계는 휴정(休靜)의 4대파 중의 하나인 편양문파(鞭羊門派)에 속하며, 화엄사상과 선을 겸수하는 가풍을 지닌 지안(志安)의 문손으로서 법맥은 휴정-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지안(志安)-체정(體淨)-상언-회정-긍선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유형(有炯)ㆍ한성(翰醒)ㆍ정관(正觀) 등이 있다. 율과 화엄과 선의 정수를 모두 갖춘 거장으로서, 평소에 교유가 깊었던 김정희는 초상화를 그린 뒤 그를 '해동의 달마(達磨)'라고 격찬하였다.


스님은 김정희, 초의(草衣) 선사 등과 선문의 요지에 대해 거침없는 상호 토론을 벌여 근세 불교계의 가장 치열한 교리논쟁을 유발시킴으로써 당시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논쟁은 이후로도 제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이처럼 한말의 격변기를 살면서 전통 선지를 재정립하여 산문(山門)을 충실히 지켜나가고자 힘쓴 대종장(大宗匠)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서로는 『정혜결사문 定慧結社文』ㆍ『선문수경』ㆍ『육조대사법보단경요해 六祖大師法寶壇經要解』 1권, 『선문염송사기 禪門拈頌私記』 5권, 『금강경팔해경 金剛經八解經』 1권, 『선요기 禪要記』 1권, 『작법구감 作法龜鑑』 2권, 문집인 『백파집』 4권 등이 있다.


환응 탄영


환응 탄영(1847∼1929) 스님은 한말의 율사(律師)로서 호는 환응(幻應), 법명은 탄영(坦泳)이며 속성은 김씨이다.


전북 무장에서 태어나 14세에 선운사(禪雲寺)로 출가하여 성시(性諡)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고, 19세에 율사 서관(瑞寬)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8년간 전국의 고승을 찾아 교학과 선학을 닦았고, 특히 계율을 엄격히 실행하여 율사로서 명망이 높았다. 서관스님에게 입실하고법을 이은 뒤 백암산 운문사(雲門寺)에서 강단을 열어 화엄대교를 선양하여 학인을 지도하였다. 이곳에서 10여 년 동안 교학을 전수하다가 노령이 되자 운문사 옆에 따로 별당을 조성하여 '우은난야(遇隱蘭若)'라 이름 짓고 이곳에서 주로 참선 정진하였다. 시문(詩文)조차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짓지 않았을 정도로 율행(律行)에 청정하였으며, 관세음보살과 영산(靈山) 16아라한에게 조석으로 분향, 공양하기를 만년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12년 일제의 사찰령으로 전국의 사찰이 31본산체제로 개편된 뒤 대중의 간청으로 백양사(白羊寺) 주지를 맡아 3년간 승풍과 기강을 바로잡았다.


1917년 선운사로 돌아가서 율전(律典)을 강의하였고, 1928년에는 조선불교중앙종회에서 교정(敎正)으로 추대되었다.4월 7일에 목욕재계하고 조용히 입적하니 나이 83세, 법랍 70세였다.


석전 정호


석전 정호(1870∼1948) 스님은 근대불교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분으로서 호는 영호(映湖) 또는 석전(石顚), 법명은 정호(鼎鎬)이다.속성은 밀양박씨이며, 박한영(朴漢永)이라는 속명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 하리에서 태어나 19세에 완주 태조암(太祖庵)으로 출가하여 금산(錦山)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21세에 장성 백양사(白羊寺)의 환응(幻應) 스님에게 4교(四敎)를 배우고, 선암사(仙巖寺)의 경운(擎雲) 스님에게 대교(大敎)를 배운 뒤, 구암사(龜巖寺)에서 처명(處明)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다. 1896년 구암사에서 개강한 뒤 해인사ㆍ법주사ㆍ백양사ㆍ화엄사ㆍ범어사 등지를 다니면서 법회를 크게 펼쳐 불경을 강의하였다.1908년 쇠퇴한 불교를 혁신하려는 뜻을 품고 상경하여 불교개혁운동에 힘을 기울였으며,1911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우리나라 불교와의 연합을 꾀하였을 때, 한용운(韓龍雲)ㆍ성월(惺月)ㆍ진응(震應)ㆍ금봉(錦峯) 스님 등과 함께 한국의 불교전통은 임제종(臨濟宗)임을 내세워 연합조약을 무효화시켰다.


1913년에는 『해동불교 海東佛敎』를 창간하여 불교유신을 주장하고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였다. 1914년에는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1916년에는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의 강사로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고, 1926년 서울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선불장(禪佛場)이라는 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의 영재들을 배출하였다.1929년 조선불교 교정(敎正)에 취임하여 종단을 이끌었으며, 1931년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었다.광복 이후 조선불교중앙총무원회의 초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다가 만년에 정읍 내장사(內藏寺)에서 노년을 보내다가 입적하니 나이 79세, 법랍 61세였다. 금봉ㆍ진응스님과 함께 근대불교사의 3대 강백(講伯)으로 추앙받았다.


경사자집(經史子集)과 노장학설을 두루 섭렵하고 시와 문장에 뛰어난 대고승으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향방을 바로잡기 위해 거침없이 활동하는 실천적인 인물로서 평가받고 있다.법맥은 상언(尙彦)-긍선(亘琁)-설두(雪竇)-설유(雪乳)-정호(鼎鎬)로 이어지며, 대표적인 제자는 운기 성원(雲起姓元) - 청담 순호(靑潭淳浩) - 운허 용하(耘虛龍夏) - 운성 승희(雲性昇熙) - 석문 남곡(石門南谷) - 청우 경운(聽雨景雲)등이다. 저서로는 『석전시초 石顚詩抄』ㆍ『석림수필 石林隨筆』ㆍ『석림초 石林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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